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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의 독서 습관

'위대한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 라는 책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 논란를 나는 알아야했다....

by 돈키호테 친구 '산초' 2025. 4. 9.

 

신념을 위해  살다간 위대한 혁명가,철학자... 많은 수식어 붙는 인물이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 편견이 무섭다. 철학이 현실세계의 실질적인 변화를 꿈꿨던 지식인이  펜을 들다. 가난으로 옷을 전당포에 맡겨서 외출도 못 했고 아이들이 돈이 없어서 병원을 갈수가 없어서 사망에 이르고 부인과 아이들 신발이야기... 다  낡아빠진.. 신발들...서로 싣고 위로 하는 가족애...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긴 그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책을 읽었다.

독일에서 제일 오래 된 도시 '트리어'는  제2의 로마라 불리며  모젤강변에 자란 백포도는  유럽에서 손 꼽힐 정도다. 신의 물방울에서 나오는 곳이 "카를 마르크스"의 고향이다.

칼 마르크스 : 위대한 평론가.. 1818년 태어남... 자본론1권만 완성 1867년 완성

변호사인 아버지 "트리어"를 지배하는 프로이센왕국는 자유로운 사상를 가진 그를  불온사상이라 정하고 탄압을 하였다.

프로이센왕국은 세습 군주제로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시대가 급격하게 변하는 시기에 태어났으며 새로운 생각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아 성장하였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규칙을 정해 지킬 것이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다.. 마르크스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해서  감각도 과학도 거짓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힘 바로 이런 이성을 길러야 한다고 그리고 이러한 이성이야말로 참과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어 철학이라는학문은 바로 이러한 생각들을 공부하는거라고....  유능한 변호사였지만 유대인이라는 핏줄 때문에 여러 제약에 따라 힘들어할 때도 아버지는 언제나 밝혀 웃는 얼굴이었다.


→  마르크스 트리어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다... 법대에 가서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이 보장되기 위해서 법과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을 공부해서 그런 제도와 법을 뒷받침하고 싶었다.


→ 친구들이여 나는 결정했다네 나는 여러분과 달리 어릴 때 특별한 경험을 했어.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네. 나는 내가 공부한 것을 믿네. 그것은 그 누구의 재산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신념이라네.  내가 비록 용기는 없지만 나는 확언 하네. 분명 왕과 귀족들만의 정치는 무너질 것이고 세상은 진보할 것이며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제도가 나타날 것을 그것이 내가 박사를 딸 때까지 공부하면서 내린 결론이라네...... 그는  불투명하고 험난한 삶을 결정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이전까지의 철학자들은 모두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인간이나 신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설명하는게 철학자들의 목표였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철학이 세상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움직이는 도구로 삼았다. 철학을 과학처럼 변화를 일으키는 에너지로 장악한 최초의 철학자가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신문사를 만들고 정보 지주계급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전반적인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대한 논의 외에 해당 지방 사람들에게 매우 민감하고 특별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으며 지주계급과 정보를 격렬하게 공격할 때 검열을 강화 폐간이 되었다. 이제 마르크스는 비록 실업자 신자가 되었지만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정보들에게 거침없이 비판을 하는 탁월한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당시 그의 생각은 사회적으로 악명이 높았다. 훗날 그가 걸어간 길은 그에게 이러한 취향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게 된다.


예니와의 결혼으로 서로 간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이자 결정이 되었다. 첫사랑과 결혼한 마르크스...예니는 마르크스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신뢰하며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마르크스에게 삶을 송두리째 바쳤다. 신혼여행에서도 책 읽으면 몰두했다. 예니와 프랑스 파리로 이주할 것을 결정했으며 이 당시에 프랑스 파리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도 자유로웠으면 당시 파리 군주였던 루이 필립은 많은 나라의 망명객과 혁명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 당시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를 말할 때 마치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신화나 상상 속에서 나오는 유투피아처럼 설명하곤 했는데 마르코스는 이것을 보다 현실 세계에 가깝게 설명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그 전까지만 해도 신흥 자본가들과 중소자본가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사회 구조적으로 노동자들이 가장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파리에서 만난 사회주의자들과 그리고 친구인 엥겔스를 통해 가장 억압받는 계급이 노동자격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프랑스와 연극은 산업혁명을 통해 일찍부터 노동자라는 계층이 생겨났고 또 자본주의의 폐위에 대해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 마르크스는 혁명의 시대가 오기 전인 1883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거의 일평생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살았다. 일부 혁명 조직의 설립에 관여했지만 아무래도 그의 주 임무는 글쓰기였다. 1849년 6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던 마르크스는 미국 신문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30세이던 1848년부터 1862년까지 14년 동안 영어로 기사를 써서 보냈다. 그 사이 마르크스는 독일 쾰른에서 영국 런던으로 주거를 옮겼다.
이 신문은 당시 20만의 독자를 거느린 세계 최대 매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럽 특파원 마르크스에게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원고료를 줄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런던 망명 생활 초기에 그나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에서 받는 원고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 마르크스가 가장 많은 기사를 쓴 매체도 이 미국 신문이다. 이 기간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기명 기사 350건, 엥겔스 명의 기사 125건, 공동 집필 12건 등 모두 487건의 기사를 이 신문에 실었다. 주제도 노예제도, 제국주의, 혁명과 전쟁, 세계의 사회와 정치, 세계 경제와 금융 등 폭이 넓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등을 쓴 학자이자 저술가이면서 동시에 기자였다.

현실 분석이 철학을 바꾸고 철학이 현실을 변혁할 수도 있음을.....